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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는 준영과 결국 헤어졌다. 이별을 통고한 것은 준영씨지만 마음으로 먼저 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아빠의 영향이 컸다. 아빠와 엄마는 사랑해서 결혼했다. 외가에서 둘을 헤어지게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고 들었다. 아빠와 엄마는 사랑의 결정체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외가에 가도 다들 웃으며 이야기 하고,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그런 아빠와 엄마의 이별을, 사랑에 대한 불신을 마음 깊이 심었다. 사랑 자체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는데, 자신은 준영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준영이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의심하게 되자 마음은…
새벽에 도장에 갔다 아침을 먹고 나갈 사람들 나가고 나면 엄마와 둘이 남는다. 두 사람이 아무리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시간이 많아서는 곤란했다. 특히 엄마와 나는 35년이라는 세월의 강이 있다. 그래서 구청에서 하는 문예 강좌 중 댄스교실에 가입했다. 차차차, 이름이 좀 이상한데 춤 이름이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시간 반뿐이지만, 매일 엄마와 손을 잡고 스텝을 밟으면 한두 시간 금방 갔다. 이게 은근히 체력을 많이 필요로 하고 평소 안 쓰는 근육을 사용하는지라 나중에는 땀으로 흠뻑 젖는다. 엄마의 경우 처음 며칠은 온…
재석이와의 사건 자체는 아무런 죄의식을 주지 않았다. 결혼의 의무는 쌍방 모두에게 있는 것이지 나만의 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결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꾸 시선이 가고 남자로 의식하게 되었다. 한 집에 남편이 아닌 남자와 같이 산다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반지를 해준다.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딸들이나 남자가 보고 이상해 하지 않을지 걱정될 만큼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답례로 시계를 산다. 남자들은 마음에 여러 개의 방이 있어 각각의 방에 여자를 담…
경수라는 애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어디서 구하는지 사진이이나 만화를 학교에 가지고와 애들에게 빌려주고 떡볶이나 학용품을 얻어가곤 했다. 지금은 시디를 밀려주고는 1000원이나 2000원 정도 받는다고 들었다. “뭐 좀 물어봐도 돼?”“네가 나에게 물어볼만 한 것이 있나? 빠구리 말고는 없을 텐데..”“그걸 물어보려고..”“..........말해봐...”예전에 한번 오락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학원비 이외에 점심과 저녁을 사먹고, 학용품을 사라고 용돈으로 30만원을 주셨었는데, 학원도 전부 빼먹고 며칠 …
경련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경련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거대한 바위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지듯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그러면서 온 몸에 활력으로 가득 차는 충만감과 근육의 에너지가 전부 방전된 나른함에 재석의 몸에 안겨들었다. ‘아이...또....’재석이가 땀으로 번들거리는 등, 정확히는 움푹 들어간 척추를 따라 쓰다듬자 짜릿한 전류가 골반 밑 꼬리뼈까지 치달렸다. 겨우 진정되던 내 안의 미지의 생물이 다시 재석의 그것을 조이는 것을 느끼자 민망해진다. ‘너무 밝힌다고 여기면 어떻게...’방바닥은 땀과 또 다른 액체로 미끈거렸고…
“자 선물~”“..........고마워......”“입어보고 보여줘~”“옷이야? 알았어..”“호호~그럼 이따 봐~”목, 허리, 등, 허벅지, 종아리가 쓰라려 반바지만 입고 엎드려 있는데, 오후에 나갔다 들어온 큰누나가 백화점 봉투 하나를 내밀고는 사라졌다. 다행히 엉덩이는 다치지 않아 간신히 반바지라도 입고 있을 수 있었지만, 누나가 처음 사준 옷이었기 때문에 봉투를 열고 입어보려 했다.“..................”팬티다. 그것도 검은색, 초록색, 빨간색 등등 칼라팬티였다. 어머니는 안에 입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띠디 띠디 띠디..”작은 알람소리지만 습관의 힘을 빌려 조용히 일어났다. 한참 잠이 많을 나이였기 때문에 이렇게 일직 일어나는 것이 지금도 힘들었다. “드르륵..”“후...아....”밤새 태양을 등지고 있던 대지에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밀려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차가운 기운이 싫었는데, 그 사이 날씨가 많이 풀렸는지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이 아직까지도 머리 근처에서 맴돌고 있는 잠을 휘저어 날려 보냈다. “탁..탁..탁..”“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응...”주방에서 어머니가 딸그락 거…
‘어머니...’아줌마를 보고 너무 반가워 어머니라고 부를 뻔했다. 아줌마는 아줌마 연배의 다른 아줌마와 함께 왔는데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던 대통령 대변인 같은 인상을 줬다. 냉정하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일상의 대화처럼 검사와 이야기를 한다. 박명수 검사는 학교에서 보였던 점잖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재석군..수고 했어..고생했지?”“...........”“미성년자를 보호자 동의 없이 이래도 되나요?”“하하. 재석군이 도둑을 빨리 잡아달라며 자발적으로 협조한 거라...”아줌마와 함께 있는 여자는 변호사였다. 아줌마의 목적은 나를 대리…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뚝배기 안에는 닭이 다리를 꼬고 섹시하게 놓여 있었다. 슬기누나가 해 줬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었다. “누나는...누나가 원하는 것은 뭐에요?”“....나는...휴....예전처럼 지내...그거면 돼...”“평생?”“..........아니....마음이 시킬 때까지...그때까지만..”그림을 그릴 때. 아무런 흔적도 없는 깨끗한 도화지를 보면 잠깐 망설이게 된다.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도화지의 깨끗함은 두려움까지 줄 때가 있다. 슬기누나를 대하는 내 마음이 그랬다. 내가 그녀를 망칠 것 같은 어…
아침이라고 해도 여름이었다. 그리고 가스를 두 개 사용하고 있었고, 좁은 주방에 세 명이 비좁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간간히 싸늘한 한기가 척추를 타고 돌아다녔다. 위기 감지능력에 따라 머릿속에 경고등이 울렸다. 위기는 감지했는데 대처능력은 현저히 떨어져 두 누나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살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탁탁탁탁...누나들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얼마 전 연주누나가 내 방에서 잠을 잔 후부터 계속 이런 분위기였다. 의심스러운 것은 연주누나와 나 사이를 현주누나가 의심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