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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색 단검 - 7부

작성일 20-01-1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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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익명 조회 23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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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색 단검 - 7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저만치까지 멀어진 유피가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건성으로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나와 그녀는 서로 은연중에 이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래, 이제는….

내일부터 그녀는 다시 훈련이 끝나도 마중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와도 예전 같은 느낌은 없을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규칙적으로 떼는 발걸음. 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면 큰길이 나올 거고 그녀와 나는 다시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다. 물론 오늘은 시간이 시간인 만큼 선택지가 별로 없겠지만…….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여자 엘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순간에 왜 그녀가 떠올랐는진 몰랐지만… 그리고 겹쳐지는 유피의 모습. 유피, 유피…….

나는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유피는 여전히 그자리에.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가 또 돌아본 걸 눈치채곤 손을 다시 흔들었다. 아니, 흔들려 했다.

타타타탓-.

“어… 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 내가 달려갔으니까. 눈이 동그래지는 그녀의 놀람을 무시하고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그대로 그녀에게 뛰어오르듯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하늘색 원피스 치맛자락이 밑으로 축 처질 정도로 그녀는 뒤로 몸이 꺾였다. 꽤나 아팠을 법하지만 나는 그러한 생각도 무시하고 그저 그녀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로키…?”

“미안해, 미안……. 미안해….”

“로키…….”

“내가 미안했어. 내가… 내가…….”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유피에게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되풀이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녀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아파.”

어리둥절한 그녀가 가느다란 소리로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야, 나는 겨우 끌어안았던 몸을 놓았다. 유피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상태였고,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반복했던 말을 또 한번 건넬 수밖에 없었다.

“미안…… 해.”

그녀는 피식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할까 생각할 동안, 이번엔 그녀가 끌어안아왔다. 나는 좀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나를 이해한다는 몸짓이었다. 나도 그녀를 마주 껴안았고 유피는 그렇게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등을 토닥거렸다.

“이제 괜찮은 거야?”

왜 그랬는지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궁금할 법도 했지만 그녀는 그 중간과정을 모조리 생략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더욱더 옭아매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할 강력한 옭아맴. 나는 또다시 울컥하고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간신히 그녀의 물음을 상기하고 짧게 대답했을 뿐….

“그래….”

유피는 그걸로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그녀의 갈색 머리칼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마주 껴안다가 얼른 눈물을 찔끔 훔치고는 그녀를 약간 떨어뜨려놓았다. 그리곤 유피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은 채로 더듬거리듯 말하는 나.

“저… 유피. 그러니까 저어…… 쭉 말하고 싶던 게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눈물이 고였었기 때문에 내 눈은 빨개져 있을 게 분명했지만, 또 유피도 그걸 눈치채고 있을 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조금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한마디한마디 또박또박, 하지만 역시 조금은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나… 나랑…….”

“…….”

“나랑…… 같이…….”

“…….”

나는 그녀의 어깨에 얹은 손을 거두어들이고 한쪽 무릎을 꿇고는, 마치 주군에게 맹세하는 기사처럼 자세를 잡았다. 유피는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린 채 더욱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떨리는 게 얼핏 보이는 순간 나는 곧바로 내뱉었다.

“정식으로 사귀어줄래?”

침묵.

그리고 잠시 후 가슴 위에 올렸던 손을 입으로 올린 채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유피. 원망스러운 긴장을 받아버린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웃은 그녀는 다른 쪽 손으로 내 팔 옆쪽을 가볍게 쳤다.

“뭐야, 그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괜히 딴소리하나 긴장했잖아.”

“딴소리라니… 어, 그…….”

물론 프로포즈 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관계를 좀 더 쌓고 싶었다. 그래…… 유피와의 관계. 요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속죄의 시간이라도 갖고 싶었는지, 혹은 긴 시간 동안의 사귐을 정식 애인이란 단계로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싶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녀를 더 사랑해주기로 마음 먹었고, 그녀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겠는가.

“좋아, 그럼 그것을 수락하지.”

어느 새 평온함으로 다시 돌아온 유피가 두 눈을 살짝 감으면서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갈구하는 포즈로 무릎을 꿇고 있었고 유피는 다른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진 채 권위있는 자리에 오른 귀족마냥 선언을 했다.

“나, 에란시아 유피는 로키 크로슨에게 애인으로서의 신념과 충성을 받칠 것을 명합니다.”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유피는 손날로 마치 칼등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양 어깨에 한번씩 갖다 댔다.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 둘은 한결 부드러워진 시선으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나는 그만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일어섰다. 유피가 주먹을 들어보이며 히죽 웃었다.

“바람 피우면 죽는다!”

이번엔 선 채로 경례를 붙이는 나는 그 전까진 몰랐던 행복감이 온몸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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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 물론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인 만큼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으나 검 휘두르기 동작을 마친 나는 온몸에 땀이 송송 배일 정도로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훈련 과정은 검 3천 번 휘두르기에서 다른 자세 교정으로 바뀌어있었고, 덕분에 휴식시간이 중간중간 꽤 주어졌다.

자리에 앉은 채 이젠 묵직함이라곤 별로 느껴지지 않는 연습용 검을 매만지는 내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내 또래의 다른 훈련생이 옆에 앉는 중이었다.

“샤로프.”

“여어, 로키. 이젠 제법 기사 폼이 나던데?”

나는 그냥 피식 웃어버렸고, 샤로프라 불린 그 녀석은 수통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도 나만큼이나 땀에 절어 있었다.

“요사이 좋은 일이 있나 봐? 검에 아주 기합이 들어가있던데?”

“무슨…. 저 교관은 훈련에 임하는 자세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점수에 반영하기 때문에 최대한 열심히 하는 척 해야지.”

그날 밤의 일 이후로 나와 유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우리는 마치 결혼한 사이처럼 아주 작은 볼일도 같이 다니곤 했다. 예전처럼 늘 훈련이 끝나면 그녀는 본래 기다리던 장소에서 마중 나와있었다. 그러면 나는 한껏 상쾌한 기분으로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아주곤 했다. 길거리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질겁하기도 했지만 그녀도 은근히 남들에게 그런 우리 사이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듯했다.

유피와 시장을 보거나 동네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개울가에서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기 일쑤였다. 무슨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우리는 늘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졌고, 작별의 키스를 할 때마다 그녀는 얼굴을 살포시 붉히며 나를 사랑한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 눈빛을 받은 나는 집에 가서도 항상 마음 속 한 가득 들어찬 기분을 느끼며 편안하고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래그래, 열심히 하는 척.”

어째서인지 ‘척’에 힘을 주어 발음하며 내게 수통을 권하는 샤로프. 녀석은 앞서 그런 척을 못하고 교관에게 질타를 받았던 훈련 초기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반쯤 남아있는 수통을 들이켰고, 샤로프는 주변에 떨어진 자갈 몇 개를 들고 장난을 치더니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엘븐 포레스트 소식 들었어? 야… 그거 신기하지 않냐?”

“음? 무슨 소식?”

그리 널리 알려진 소식은 아니었는지 내가 모른다고 해도 샤로프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여전히 자갈을 굴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지나가는 음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지 경청하게 되었다. ‘엘븐 포레스트’란 명칭에 신경을 꺼두고 있던 예전의 일이 상기됐기 때문이었다.

“엘프를 찾는다고 하던데 말야. 뭐 엘프가 본래 용모가 빼어나긴 하지만, 그 찾는다는 여자 엘프는 특별히 예뻤나 봐. 엘븐 포레스트 내에서도 꽤나 각광을 받았던 모양인데. 씁….”

“그거 대단한걸.”

나는 녀석의 얼굴에 ‘쭉쭉빵빵한 여자 엘프랑 한 번 자봤으면’하는 바람이 노골적으로 피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애써 키득거림을 참았다. 샤로프는 내 예의상의 반응이 맘에 들었는지 본론을 구체적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도 이 마을을 방문했던 엘프 무리들 기억나지? 왜, 그 있잖아. 입구쪽 경비병에게 서류를 건네주며 뭔가 얘기하던 대여섯 명의 엘프들.”

나 또한 남자 엘프든 여자 엘프든 거의 단독으로 다니던 평소의 모습에 비하면 좀 이질적이었기에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어서 그냥 교역차 들렀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꽤 왕성한 샤로프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기어코 알아낸 모양이었다.

“아까 말했던 그 여자 엘프가 좀 다른 방향으로도 대단했던 모양이야. 학식은 물론 무술에도 능해서 각종 대회에서 상을 쓸고 다녔대. 거기다가 어찌나 마음씨 좋고 친절한지, 인간 마을 쪽으로도 뭔가 큰 거래가 있을 시 그녀를 동반하면 이미지가 좋게 박혀서 거래도 잘 성립이 됐다고 하더라고.”

“과연 각광받을 만하군.”

나는 수통의 남은 물을 들이키며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그의 칭송에 적당히 반응하며 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나온 얘기는 내 뇌리를 살포시 스쳐가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게 했다.

“특히 그녀는 단검을 잘 쓴다던데.”

“단검?”

살짝 끝의 음성을 높이는 내게서 샤로프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어때? 내 정보력 대단하지?’라고 자랑하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나 내가 의문감을 표현한 건 단검이란 단어에서였다. 단검을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손가락이 예민하다. 정확히 목표물에 명중하거나 재빠르게 상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예사롭지 않은 감각을 요구하기 때문.

나는 어째선지 그런 예민한 손길과 내가 만났던 여자 엘프의 모습이 교차되듯 머릿속을 지나감을 느꼈다. 샤로프는 다시 먼산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갈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가 뭔 일을 저질렀는지 갑자기 엘븐 포레스트 전역을 발칵 뒤집히게 만들었던 모양이야. 그리고는 도망쳤다는데.”

“그것 때문에 엘프들이 찾으러 왔나 보군. 혹시 이 마을에도 들렀나 해서.”

“그랬겠지…. 하지만 별 소득 없을 거야. 인간들은 본래 엘프들의 사건에 별로 신경을 안 쓰잖아? 인간과 교류를 한다고는 하지만 종족 자체가 다른 만큼 서로의 사건에 하등 관계없는 일이 대부분이고, 무슨 일을 처리해준다 해도 보수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으니까. 뭐 나같이 시시콜콜한 기사거리까지 다 살펴보는 타입이 아닌 이상….”

샤로프는 약간 실망감이 섞인 표정으로 내게서 수통을 가져갔다. 나도 모르게 남김없이 다 마셔버렸기 때문이었다. 샤로프는 다시 물을 뜨러 가야 하는 귀찮음을 표출하며, 하지만 내게 회심의 놀라게 해줄 기사거리가 있다는 듯 미심쩍게 웃어보였다.

“그 여자 엘프가 어떻게 엘븐 포레스트를 뒤집히게 했는지 알면 놀랄걸?”

나는 어쩐지 그의 미심쩍은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온 말에 대한 내 반응은 샤로프를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정사에 미쳐서 수십 일간 신변을 감추고 다니며 엘븐 포레스트 곳곳의 남자 엘프를 강간했대. 여자가 말야. 그것도 모자라서 뒤끝을 없애기 위해 모조리 살해했다나? 공식적으로 발표된 문서에도… 아, 요번에 갖고 왔던 문서에도 적혀있었다지? 진홍색 단검.”

“…진홍색 단검?”

샤로프는 자못 심각하게 표정이 변한 나를 그저 의외의 소식에 놀란 것으로 치부한 채, 자신만의 어떤 상상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워낙 특이한 사건이라 그녀에게 붙은 별명이 호칭으로 변할 만큼 파급적이었나 봐. 늘 단검을 새빨간 피로 물들이고 다니기 때문에 그랬겠지. 아마 내 생각이건데, 그녀는 단순히 살인을 즐기진 않았을 거야. 왜 붉은 단검도 아닌 ‘진홍색’이란 수식어가 가미된 호칭이 붙었겠어? 진홍색이 무슨 색깔이라 생각해? 검붉지만 예쁜 색을 지칭할 때 쓰잖아. 섬뜩할 정도로 예쁜, 하지만 위험한 단검이란 거지.”

“…….”

나는 입을 다문 채 초점이 고정되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로프는 내게서 가져간 수통을 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일어서서 수돗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이! 과업 시작 직전인데 어딜 가나!”

“물 좀 뜨러 다녀오겠습니다! 헤헤.”

“저 자식이… 쉬는 시간엔 뭐하다가 이제야.”

훈련장으로 들어오던 교관은 한심한 듯 그런 샤로프의 모습을 보면서 호통을 쳤고, 녀석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헤죽거렸다. 나는 그런 샤로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약간 쌀쌀한 바람을 느끼고는 한쪽 팔을 문질렀다. 어쩐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감싸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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