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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새벽 -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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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833회 작성일 20-01-1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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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일단 견인 하셔야 되겠는데요?”



보험사 직원이 자동차의 이것저것 만져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정우는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여자친구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몇 번이고 그 직원에게 봉고차와 사내들의 정체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과 말 한 마디 섞지 않는 여자친구의 태도도 태도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정갈해 보이지 않는 저 잠바가 신경이 쓰인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서울까지 가죠?”



“음. 일단 차는 직접 견인해 가면 되고, 서울까지 모셔다 드리는건 힘들지만, 일단 어디까지는 제 차로 이동하시면 되요.”



정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은비에게 걸어갔다. 그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저 봉고차였다.



‘왜 안 가지?’



정우는 곁눈질로 봉고차를 쏘아봤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이상해 보이는 은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보험사 차량 타고 가면 된데.”



은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시끄러운 음악이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것도 아닌데. 정우는 조금 부아가 치밀어서 은비의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을 빼어내며 다시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너야 말로 무슨 짓이냐? 지금 상황이 어떤지나 알고. 후우. 됐고, 다 끝났어. 보험사 차량 타고 가면 된데.”



“알았어.”



“그것보다, 너 지금 그 잠바는 누구 거냐? 설마 저기 봉고차 남자가 준 거 입고 있는 거야?”



은비는 애써 태연한 척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의식적으로 입을 닫으려 노력했다. 정우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단념하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성렬이 곁에 다가와 서 있었다. 정우는 물론이고 은비까지 그런 성렬을 똑바로 쳐다봤다.



“무슨 일이시죠?”



“별다른 인사가 없으시길래, 가지도 못하고 있었지.”



“인사요?”



마흔은 족히 되어 보이는 성렬이 정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은비는 성렬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살짝 인상을 구겼다.



“어떤, 인사를 말씀하시는 건지?”



“아니, 한 시간 동안이나 애인을 지켜준 사람한테 무슨 인사라니.”



“아. 생각이 짧았습니다. 감사드려요.”



“아가씨도 감사하지?”



성렬과 정우가 거의 동시에 은비를 쳐다봤다. 은비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앞만 쳐다봤다.



“그런데 서울엔 어떻게 가게?”



“보험사 직원분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



말끝마다 반말이다. 정우는 조금 신경이 거슬렸지만, 당장 아까 휴게실에서 본 뉴스 생각에 고분고분 대답을 계속했다. 저 눈치 없는 보험사 직원이 재주껏 눈치라도 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험사 이용하면 서울까지 쭈욱 가지는 않잖아? 그렇지?”



성렬이 보험사 직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험사 직원은 주위를 훔쳐보다, 그 말의 대상이 자신임을 알아차리곤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렬은 은비와 정우 몰래 베시시 웃으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랑 같이 가지.”



“네?”



“뭘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 누가 잡아먹나?”



“이것 봐.”



이제껏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은비가 성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정우는 여자친구가 나서지 않기를 바라는 얼굴로 은비를 쳐다봤다. 하지만 성렬은 너무나 여유롭게 그런 은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가 입고 있는 그 옷, 내거잖아. 그거 돌려줄래? 보기보다 비싼 옷이라서.”



은비는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엉겁결에 정우의 눈치를 살폈다. 정우는 은비가 가만히 있어주기를 바라면서도 성렬의 눈치를 살폈다. 성렬은 은비를 보며 살짝 웃기 시작했다. 보험사 직원만이,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세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볼 뿐 이었다.









15.





졸지에 반갑지 않은 동행이 시작되어 버렸다. 보험사 직원을 뒤로 하고, 흔들리는 봉고에 탄 채 정우와 은비, 그리고 중년 남자 두 명은 말이 없는 동행을 시작했다.



‘병신 같은 놈. 전화기는 뒀다 어디다가 쓸래?’



정우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무능력함을 한탄했다. 하지만 이미 기회의 시간은 지나가고 없었다. 바지춤에 손을 밀어 넣은 채, 애꿎은 전화기만 매만졌다. 그나저나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앉아 있는 은비는, 여전히 다리를 꼰 채 아무런 말도 없었다.



“둘 다 학생이라고?”



성렬이 고개를 돌려 정우와 은비를 쳐다봤다. 가만히 창문만 바라보던 은비가 슬쩍 고개를 돌려 성렬를 쳐다봤다.



“아까 창우가 그러더라고, 둘 다 학생이라고. 아. 소개가 늦었지? 이쪽은 임창우라고 하고, 나는.”



“그만혀.”



스틱을 움직이며 봉고를 몰던 창우가 성렬을 쏘아보며 말했다. 일순간에 험하게 변질되어 버린 자동차 안. 성렬은 머쓱하게 웃으며 손으로 알았다는 제스처를 펴 보였다.



“그나저나 두 사람은 사귄지 얼마나....”



“작작하죠?”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은비가 성렬을 쏘아 붙였다. 정우가 안절부절 못하며 성렬과 창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룸미러로 또 다시 창우의 그것과 조우할까 싶어 고개를 아래로 내리 깔았다.



“아직도 기분이 안풀렸나?”



“그만하라구.”



“저기, 내가 아까 그 쪽 애인한테 실수를 좀 했거든.”



“그만.”



“알았어, 알았어.”



“무슨”



정우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은비의 얼굴을 쳐다봤다. 성렬을 노려보고 있던 은비는 서둘러 창가쪽으로 시선을 내던졌다. 그러자 성렬이 정우를 향해 슬쩍 웃으며 말했다.



“학생인지도 모르고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놀렸거든, 내가.”



“아 네.”



“그나저나, 그 쪽은 성함이?”



“네?”



정우는 날이 선 긴장감을 느끼며 성렬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곤 잠시 고민하다가, ‘정우’가 아닌 ‘성신’이라는 이름을 그들에게 토해냈다. 은비도 고개를 돌려 정우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리를 꼰 채 그대로 다시 창문만 쳐다봤다.



“성신.”



“성신.”



성렬과 창우는 차례대로 정우가 창조해낸 이름을 속삭이듯 말했다. 무언가 개운한 기분이 들지 않아 정우가 슬쩍 앞을 쳐다봤을 때, 인상을 구긴 채 앉아 있던 창우와 벌써 세 번째 마주치고 말았다. 정우는 서둘러 고개를 아래로 내리 깔았다.







16.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 갑시다. 새벽 운전도 힘들고.”



이미 차는 휴게소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우와 은비에게 있어 일방적인 통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우는 잘 됐다 싶었다. 그리곤 바지춤에 손을 밀어 넣곤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나는 물 좀 버리고 올게유.”



“아, 저도.”



창우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정우가 기다렸다는 듯 봉고에서 내렸다. 창우와 성렬의 시선이 거의 일제히 정우를 향했다. 아뿔싸. 너무 티나게 행동했나. 정우는 머쓱하게 웃다가 서둘러 은비에게 말을 걸었다.



“넌 그냥 있으려고?”



은비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다리만 꼬고 있었다. 그 태도가 꼴보기 싫어서 정우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걸어갔다. 창우는 서둘러 그런 정우의 뒤를 따라 갔고, 성렬은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 쯤 고개를 돌려 은비를 쳐다봤다.



“고개 돌려.”



눈을 질끈 감은 은비가 성렬을 향해 소리쳤다. 성렬은 슬쩍 웃으며 은비에게 말했다.



“대기업 대리를 창녀 취급했으니, 화 날 만도 하지. 미안해. 사과한다.”



은비는 눈을 치켜뜨며 성렬을 쏘아봤다. 어떻게 알았을까? 정우는 줄곧 창우와 함께 있었고, 본인은 당연하게도 그런 사실을 성렬에게 말했던 기억이 없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은비는 상렬을 쳐다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차문 고리에 손을 얹었다.



“어디 가려고?”



성렬이 자동차 잠금 장치의 락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당겨도 열리지 않는 봉고차의 문을 연신 잡아당기던 은비가 성렬을 쳐다보며 말했다.



“옷 사러 갈려고. 이런 거지같은 옷 때문에 쓸 데 없는 약점 같은 거 잡히기 싫으니까.”



“약점이라. 아까는 그렇게 즐겨놓고 그 딴 소리를.”



“닥쳐. 문이나 열어.”



“후우. 솔직히 창녀나 대기업 대리나. 밑에 구멍만 달고 있으면 그게 그거 아니냐? 어차피 좋으나 싫으나 냄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왜 그리 뚱한 표정으로 있어. 신경쓰이게.”



“문 열어.”



성렬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은비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성렬은 그런 은비를 훔쳐보다 천천히 봉고에서 발을 빼어 냈다.









서둘러 화장실로 걸어 들어온 정우는 화장실문을 굳게 걸어 잠그곤 번호를 생각했다. 번호를 누른다. 그리고 수화기에 입을 가져다 댄다. 그 뿐이다. 정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찝찝한 느낌 때문에 차마 번호가 눌러지지 않았다. 고작 20퍼센트 정도 남아있는 휴대폰 배터리. 정우는 한 동안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애꿎은 변기물만 내리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히익!!”



저벅거리는 발걸음으로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창우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입이 마른다. 정우는 품안에 스마트폰을 꼭 당겨 넣은 채, 창우를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뭘 그리 놀래유?”



창우는 역시나 플랫한 톤으로 말했다. 정우는 사람이라곤 둘 뿐인 화장실에서 창우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스마트폰이라는거유? 구경 좀 합시다.”



조여드는 공포. 정우는 겨우 진정을 하며 창우에게 천천히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창우는 그런 정우의 태도를 하나라도 빠짐없이 캐치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매만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지 않았길 망정이지. 전화라도 걸었으면, 흔적이라도 남았다면.’



정우는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창우는 꽤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정우의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만져댔다. 그리곤 그것을 정우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담배피쥬? 저기 가서 담배나 한 대 핍시다.”









은비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성렬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하지만 서둘러 자신의 몸에 걸치고 있는 이 낡은 잠바를 벗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긴 옷 같은 거 안 팔어. 시간 낭비하지 말자. 그럴 시간에 빠굴이나 한 번 더 진하게 뜨던가.”



말 같지 않은 말을 상대할 기력이 없다. 은비는 형색이 초래한 휴게소의 이곳 저곳을 누비며 상의를 대신할 수 있을 만한 천조각을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성렬의 말 대로 그건 허사였다. 은비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며 타는 갈증을 죽이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호오. 어이. 알바. 이건 뭐냐?”



은비는 자신의 뒤 쪽에서 흘러 나오는 성렬의 말소리에 조금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성렬은 한 손에 콘돔 하나를 쥐어 들며 알바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이제 스무살 쯤 되었을까? 알바는 핫팬츠 차림의 은비를 슬쩍 훔쳐보면서 성렬에게 말했다.



“콘돔이요. 체리향 나는.”



“콘돔에서 체리향이 나?”



“네.”



“그럼 입에 넣고 빨면 체리맛이 나는 거냐?”



“그야 저도 모르죠. 사용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알바는 은비의 눈치를 살피며 쥐죽은 듯 말했다. 은비는 성렬을 노려보다가 캔커피를 손에 쥔 채 편의점을 빠져 나갔다. 성렬은 입맛을 다시며 손에 들린 콘돔을 두 세 개 사서는 알바에게 건넸다.





17.





“체리맛 나는 콘돔이라는데, 한 번 사용해 볼텨?”



성렬이 캔커피를 마시고 있던 은비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은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성렬은 은비의 곁에 바싹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서울까지는 앞으로도 몇 시간은 더 가야 돼. 이왕 이렇게 된 거, 적당히 즐기자고.”



“입 닥쳐.”



“비싸게 굴지 말고. 남자친구가 아까 있었던 일 알아봐야 피차간에 좋을 게 없잖아?”



“완전 구닥다리네. 협박이랍시고 하는 말이 고작 그런 거라니. 좋을 대로 하시던가.”



은비의 그런 태도엔 성렬도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은비의 그런 태도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거친 중년의 성적 본능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성렬은 손에 들린 콘돔을 꼭 쥐며 은비를 쳐다봤다. 은비는 손에 들린 빈 커피캔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화장실.”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은 하네?”



“안 할 이유도 없지.”



과연 저것이 강간당한 여자의 태도란 말인가. 성렬은 그런 은비의 태도를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은비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참으며 서둘러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인적이 없는 화장실에 우두커니 앉아, 은비는 고개를 숙였다. 춥다. 그러면 그럴수록 꼬질고질한 잠바에 몸을 의지해 나갔다. 강한 척 연기하는 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은비는 고개를 슬쩍 아래로 내려, 아까 성렬이 드나들었던 자신의 그곳을 천천히 살펴봤다. 휴지를 몇 칸 뜯어 그곳을 살짝 만졌을 때, 묘한 느낌이 전해져 서둘러 휴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변기물을 내렸다. 쏴아하며 내려가는 변기소리. 은비는 옷차림을 정리하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성렬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앞에서 말했다.



“역시, ‘이거’ 한 번은 쓰고 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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