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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 3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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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34회 작성일 20-01-1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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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부-



“자, 수고했다. 미쓰김은 들어가서 일 보고.......”



사무실에서 들고 나온 커다란 상자를 보고 상인들의 시선이 모인다. 포장을 뜯어내자 납작하게 접혀있는 휠체어가 나오고 옆에는 묵직한 배터리가 있어 한 눈에 전동 휠체어임을 알 수 있다. 한 옆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있던 지수가 휠체어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와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어머! 오빠...... 이게 다 뭐예요?”



“응...... 허허허...... 보면 몰라? 휠체어지 뭐야?”



“아유 차암...... 누가 그걸 몰라요? 웬 물건이냐는 말이죠.”



“민철이는 어디 갔어? 안 보이네?”



“형님이 아침에 병원 데리고 갔어요.”



“어! 그래?...... 오늘 일요일도 아닌데...... 어쩐 일이지? 혜숙이가 시간이 나던가 보네?”



“아유 참, 오빠는...... 요즘 방학이잖아요. 보충수업 말고는 시간 자유롭게 쓸 수 있대요.”



“아! 그렇겠구나...... 그나저나 요즘 우리 지수를 안아주질 못해서 어쩌지? 오빠가 동서남북으로 바빠서 말이야.”



“어머! 오빠는...... 누가 들어요. 조용히 하세요.”



당황한 지수의 얼굴이 보기 좋게 빨갛게 달아오르고 입가에 웃음이 피어난다. 그 사이 얼굴의 그늘이 사라져 한껏 피어오른 지수의 얼굴은 정말 학창시절 메이퀸이었다는 혜숙이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거 민철이 주려고 샀어.”



“어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과 남편을 생각해주는 강주의 마음 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시누이 혜숙이의 배려로 강주에게서 여자의 기쁨을 누리고부터는 하늘 아래 두 남편을 모시고 사는 입장이어서 매사에 민철을 보기가 떳떳하지 못하였는데 그런 마음을 헤아리는지 틈만 나면 자신과 남편을 챙겨주는 강주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흑......”



“야, 야...... 지수야. 왜 그래?......”



“흑...... 죄송해요. 오빠...... ”



“뭐가 미안해? 참 나...... 내가 이깟 것 하나 선물하는 게 뭐 대수라고...... 저기 봐라. 요즘 애들 장난감도 이렇게 굴러다니는 게 있더라고...... 이게 있으면 지수도 한결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잖아. 킥킥...... 그래야 오빠하고 연애도 자주 할 수 있을 거고...... 그렇지? 킥킥......”



강주의 장난에 그제서 고개를 들고 웃는 얼굴에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아유, 몰라요...... 웃기지 마세요. 큭......”



“히힛...... 지수...... 너......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아이 차암......”



지수는 강주의 등을 큰 소리가 나도록 때리고 자기 자리로 가서 큰 눈을 희게 뜨고 째려본다. 지수의 입가엔 행복이 묻어있어 마주보는 강주도 한껏 웃어준다.

빨간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혜숙이가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린다.



“어머! 강주씨...... 너, 드디어 모가지 당했나 보구나. 그 옷차림이 뭐니? 도대체...... 호호호......”



“하...... 계집애. 또 시작이다. 저, 저...... 주둥이를 어떻게 콱......”



“호호호......”



만나기만 하면 아옹다옹 다투는 모습이 지수에겐 더 없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뛰어가 민철이의 휠체어를 차에서 내려 앉혀준다.



“어! 형님...... 오늘 쉬시나 봐요? 어디 놀러 가시지도 않고......”



“응...... 그래. 병원 다녀오니?”



“네. 그건 뭐예요? 웬 휠체어를......”



“응, 조금만 기다려 봐. 이제 다 됐어.”



바쁘게 손을 놀리는 강주 옆에 혜숙이가 쪼그리고 앉는다.



“강주씨, 이거 전기로 가는 거야?”



“응, 보면 모르니? 바보야......”



“이거 누구 건데? 민철이 줄 거니?”



“그럼, 내가 타고 다닐까 봐?......”



“얼마 들었는데?......”



“이백오십만 원...... 왜? 너...... 감동 먹었지? 뽀뽀라도 해주고 싶지? 그렇지?”



“나쁜 놈...... 너 또 어느 년 등쳐먹었니?”



“그럼 그렇지...... 네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리가 없지.”



“하하하......”



“호호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철이와 지수는 배꼽을 잡고 허리를 꺾는다.



“와...... 형님, 이거 정말 저 주실 거예요?”



“그래, 자. 다 됐어. 일단 조립은 다 됐으니까. 나중에 접을 때는 이 배터리만 들어내고 접으면 되는 것 같더라. 이거 읽어 보고......”



강주가 전해주는 매뉴얼을 받아보는 민철이도 입가에 환한 웃음이 걸리고 혜숙이는 뒤돌아 서 눈물을 훔치는 것 같아 모른 척 사무실로 들어간다.



“아이고...... 소장님...... 아직 인천에 안 가셨어요?”



“네, 부소장님. 이제 가야지요. 무슨 물건이 배달 됐다고 해서요. 자, 그럼 부소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 마시고 볼일 잘 보십시오. 제가 부탁드린 거 잊지 마시고요. 허허허......”



“아, 네...... 염두하고 있습니다.”



주차장으로 나오니 민철이는 어느새 휠체어를 갈아타고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혜숙이와 지수는 서로 손을 잡은 채 바라보고 서있다.



“혜숙아, 가자.”



“응? 어딜?......”



“모처럼 만났는데...... 드라이브 어때?”



“어머! 형님, 좋으시겠어요?”



옆에 서 있는 지수가 혜숙이의 팔을 놓으며 등을 떠민다. 혜숙은 강주를 따라 나서려다가 쉬는 날도 없이 매일 고생하는 지수가 마음이 쓰이는지 차라리 지수를 데려가라고 하지만 내심 인천으로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강주가 오히려 난감해진다.



“에이...... 인천에 가려고 했는데, 지수는 자리 비우고 멀리 못 갈 거 아니야?”



“아! 형님, 인천 가시게요? 그럼 데리고 갔다가 오세요. 모처럼 바람도 쐬고...... 마침 이것도 있으니 코너는 제가 보면 되겠네요. 와...... 이거 굉장히 편한데요. 하하하......”



“그럴까? 그럼...... 갔다가 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네, 형님. 그럼 저녁에 저희 집에서 한 잔 하게 회감이나 좀 떠 오세요.”



“야, 인마. 회감이야 여기도 지천인데...... 그래, 알았다. 자...... 지수야. 타라.”



“어머! 이 차는 또 뭐야? 와...... 고급차네? 너 정말 수상한데...... 이건 또 어느 년 골을 빼 먹은 거니?”



“하여튼 계집애가 막말은...... 이걸 그냥 어디로 확 시집을 보내 버릴 수도 없고...... 잔소리 말고 너도 저녁에 동생 집으로 와.”



차를 타고 떠나는 두 사람에게 혜숙이와 민철이가 손을 흔든다.



차를 타고 가면서 영진유통의 일을 말해 준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지수의 눈에 애정이 가득하다.



“어머! 오빠 정말 대단해요. 그럼 지금 그 매장에 가 보는 거예요?”



“후훗...... 응...... 매장은 잠깐 보기만 하면 되니까 거리 구경이나 좀 하고 회나 사서 돌아오지. 뭐......”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을 따라서 흥얼거리는 지수의 모습이 한껏 여유롭다. 강주를 만나 삶이 윤택해진 정도라면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일 것이지만 강주가 곁에 있어 보장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안정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안팎으로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민철이와 그나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인심이 곡간에서 나온다는 옛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주를 만나 가정이 깨져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강주 덕에 가정을 유지하고 사는 것인지는 지수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문제일 뿐이니 과연 한가로운 자들이나 질문을 던질 일이다.



“회장님, 저 최강주입니다.”



“네, 최이사님. 어머! 인천에 들어오신 거예요?”



“네, 지금 본사 쪽부터 한 바퀴 돌아볼까 합니다. 오늘은 겸사겸사 동생을 데리고 와서 여러 곳은 못 볼 것 같습니다.”



“네, 차라리 다행이네요. 제가 지금 무역에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거든요. 최이사님, 언제 오실지 몰라서 명함은 본사 매장 사무실 아가씨한테 맡겨 뒀어요.”



“아니...... 암행을 하라면서 명함을 맡기시면 어떻게 해요? 하하하......”



“아유, 하필 우리 인쇄소가 그 쪽이라...... 어차피 이사님이 매장 한 번만 보면 끝일 텐데, 그 다음은 얼굴 알아도 상관없잖아요. 호호호...... 본사에서만 모른 척 하시면 소문이 나더라도 매장에서야 어쩔 수 없겠지요.”



“네, 아무튼 잘 알았습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지요.”



“네, 그럼 수고하세요.”



용현동에 도착해 넓은 주차장을 끼고 있는 한 매장으로 들어선다. 위는 본사 사무실로 보이고 일층을 매장으로 쓰고 있어 손님은 많이 들 것으로 보인다.

지수는 강주에게 다정하게 붙어 팔짱을 걸고 나란히 걷는다. 누가 봐도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니 전혀 어색하지가 않아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

지수는 바구니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입구에 있는 카트를 끌고 오며 딴청을 부린다.



“오호라! 아주 오늘 뽕을 뽑을 작정이구나......”



“아잉...... 오빠...... 호호호......”



“응? 큭큭...... 아...... 녹는다. 좋아. 좋아...... 봐준다. 하하하......”



지수는 모처럼 강주와 둘만 있는 것이 행복한지 온몸을 흔들며 장난스럽게 교태를 부리고 강주는 웃으며 혜숙의 어깨를 안아준다.



“여보......”



“응?......”



“킥킥......”



“왜?......”



“으응...... 그냥...... 오빠한테 여보라고 하니까 왠지 이상해서......”



“뭐, 난 듣기만 좋은데...... 그리고 너...... 내 마누라 맞잖아? 너...... 나하고 응응응 할 때 여보라고 몇 번이나 하는지 알아?”



“피...... 그거야 흥분했을 때니까 그렇지. 뭐...... 호호호...... 알았어요. 난 언제까지나 오빠하고 민철씨 마누라로 그렇게 살 거야.



“그래, 그래야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지수는 카트를 밀고 가는 강주의 팔에 매달려 나란히 걷고, 강주는 야채코너로 접어들면서 직원에게 묻는다. 아직 한창 손질 중인지 여기 저기 빈 공간이 많다.



“저....... 정구지가 어디 있나요?”



“네? 정구지요? 그런 거는...... 없는데요.”



“아! 네, 고맙습니다.”



“지수야, 너도 필요한 거 있으면 전부 사.”



“네, 지금 보는 중이에요.”



“얼른 보고 나가서 점심부터 먹자. 아침도 시원찮게 했더니 배고파 죽겠다.”



“호호...... 네......”



공산품 통로에 여기저기 물건을 잔뜩 늘어놓고 한창 진열에 바쁜 여직원들에게 다가가 묻는다.



“여기...... 생리대가 어디에 있나요?”



“어머! 푸훗...... 저쪽 뒤로 가 보세요.”



여직원들은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부인 생리대를 찾고 있으니 그 모양이 우스운지 입을 가리고 웃으며 턱짓으로 방향을 일러준다.



“아! 네...... 고맙습니다.”



“아유...... 오빠는 창피하게 생리대는 왜요?......”



“응? 하하하...... 차에 넣어 두려고 그러지. 그거 얼마나 유리창이 잘 닦이는데...... 혜숙이는 잘 알고 있을 걸...... 다음에 너도 한 번 닦아 봐. 킥......”



“으이그...... 내가 이런 변태 오빠를 믿고 살아야 하나...... 카트 이리 줘 봐요. 저 쪽에 가서 물건 좀 골라오게......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어요.”



물건이 잔뜩 깔린 복잡한 통로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며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깡충거리며 물건을 고르던 지수가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듯 시선을 고정시키고 한참을 바라본다.



“어머나!”



“왜?......”



“아, 아니에요.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참 닮은 사람도 많이 있네요.”



“에이, 난 또 뭐라고...... 자, 이제 대충 봤으니까 나가자.”



“오빠, 명함 받아 가야 한다면서요?”



“응, 밥부터 먹고...... 어차피 다시 올 건데...... 나도 아침부터 쫄쫄 굶었어. 어서 가자.”



“네......”



지수는 아직도 뭔가 아쉬운지 여러 차례 두리번거리며 매장을 나선다.



“왜, 뭐 빠뜨린 거 있어? 그럼 나중에 다시 올 거니까 그때 사고 우선 밥부터 먹자.”



“네, 알았습니다. 호호호......”



차 트렁크를 열어 짐을 실어두고 밖으로 나선다. 일부러 인천까지 왔는데 지수에게 회를 사 줄 생각으로 걷다보니 한참을 걸어 시장 입구까지 내려오게 된다. 자리를 잡고 김과장에게 전화를 건다.



“아! 김과장님?......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아! 최소장님.”



“잘 지내십니까? 저 지금 회사 근처에 있는 횟집에 와 있는데 식사하셨습니까? 모처럼 김과장님도 보고 싶고 해서 지나가다 들렸습니다.”



“아이고...... 식사야 했지만 그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네, 그럼 골목 따라서 쭉 내려오시면 시장 입구에 송도횟집이라는 곳입니다.”



김과장은 신을 벗고 올라서면서 반가운 듯 손을 흔들고 옆에 있는 지수를 보고는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다. 이미 강주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잘 알고 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닐 게다.



“그래...... 어떻게 지내시는데 불편하신 건 없습니까?”



“네, 잘 지냅니다. 다만 한 번씩 사장님이 최소장님 안부를 물을 때마다 좀 곤란해서 그렇지요. 하하하......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인천까지......”



“아, 지금 휴가 중입니다. 모처럼 동생 데리고 나들이 나온 겁니다. 참 그나저나 위로 실세 부장이 한 사람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 사람하고는 잘 지내시죠?”



“네, 저야 뭐...... 제가 맡은 일만 하니까 부딪힐 일은 별로 없습니다. 아는 척하고 열심히 해 봐야 일거리만 자꾸 늘어날 텐데요. 뭐...... 허허허......”



“하하하...... 아, 그래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 주셔야 여기서 뿌리를 확실히 내리실 거 아닙니까?”



“아이고, 처음에야 물론 그랬지요. 그런데 공연히 주변에서 미움이나 살 것 같아서 그냥 그럭저럭 지냅니다.”



역시 김과장다운 생각이다. 하지만 그도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그의 판단기준을 나무랄 일도 아니고 비웃을 일도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는 가정에서나 소속된 직장에서나 아픔을 체험해 본 사람이 아닌가? 절박한 상황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현대판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즈음에 나름의 삶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일 테니 그저 격려를 해 줄 뿐이다.



“그래요. 잘 지내시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아가씨하고도 잘 지내지요? 하하하......”



강주의 물음에 지수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쑥스러운 듯 대답하는 모습이 여전한 모양이다. 김과장과 한참의 이야기 뒤에 커피를 대접한다기에 마침 사무실 구경도 할 겸 모른 척 따라 올라간다. 지수도 강주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암행감찰을 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맹랑하게도 시치미를 떼고 따라나서는 것이 은근한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어! 아니, 사장님 아니십니까? 하하...... 안녕하셨습니까?”



이층 계단을 오르려는데 영진 사장이 내려온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강주를 보고 뛰어 와 손을 잡는다. 사장도 강주의 복장을 보고 얼른 알아보질 못한 모양이다.



“어이구...... 이거 최소장님 아니세요? 여기는 어떻게 연락도 없이......”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근처에 지나다가 생각이 나서 김과장님도 뵐 겸 와 봤습니다. 어디 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아! 네...... 야, 이거 최소장님이 오셨는데 모임이 있어서 안 갈 수도 없고, 다음에 한 번 시간 내서 다시 한 번 만납시다.”



“아, 그러시죠. 뭐...... 오늘만 날이겠습니까?”



사장이 일행이 있는지 계단을 돌아보고 뒤 이어 계단을 팔랑거리며 내려오는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들린다. 회장은 분명히 무역에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했는데 경쾌한 발소리가 강주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음......”



“어머!”



낮은 신음소리로 서로를 보고 놀란 기색이 분명하지만 다른 이들은 사장의 행동에 이목이 집중돼 미처 알아보질 못한 모양이다. 사장의 뒤를 따라 내려온 여자는 언젠가 회장과 모임에 참석했을 때 함께 시간을 보냈던 민희였다.



“자, 그럼 제가 다음에 한 번 연락을 넣겠습니다.”



사장은 강주와 헤어져 돌아서고 따라가는 민희가 뒤를 돌아보며 웃어 보이자 강주는 감정을 감추고 슬그머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 사장에게 이야기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파티션 뒤로 상담을 하는 곳인지 원탁과 의자가 몇 개 놓여있고 강주와 지수는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잠시 후 여직원이 커피를 올려두고 나가고 김과장이 웬 사내를 안내해 와 소개를 시킨다.



“전에 사장님이 말씀하시던 그 최소장입니다. 최소장님, 우리 부장님이십니다.”



“아!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아, 아...... 네, 앉으세요. 저 황부장입니다.”



황부장도 사장에게 들은 바가 있는지 조금은 경계를 하는 모습이더니 이내 긴장을 풀어 버리고 거들먹거린다. 수하에 있는 김과장보다 훨씬 아랫사람으로 보이는 젊은이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저희 매장은 들어가 보셨습니까? 요즘 바빠서 많이 엉망이지요?”



사장이 가끔 거론하는 인물이라 황부장도 의왕매장은 다녀갔을 터 은근히 꿀리기 싫은지 매출이 높은 본사 매장이랍시고 과시를 하는 모양이다. 장난기 가득한 강주가 모른 척 받아줄 리가 없다.



“네, 많이 바쁜 모양이더군요. 직원들을 많이 늘리셔야 하겠어요.”



강주의 속을 알 리 없는 황부장은 흐뭇한지 한마디 더 늘어놓는다.



“허허허...... 안 그래도 지금 채용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최소장 같은 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곧 신규출점을 할지도 모르는데......”



“아! 그러십니까? 뭐, 월급만 많이 주신다면 한 번 생각해 보지요. 하하하......”



김과장이 속없이 더 반가워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강주가 온다면 꽃 피는 춘삼월이 다시 오는 격이니 그도 그럴 것이다. 이내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는 실망하지만 어쨌든 강주와 연이 닿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강주가 찾아 온 것만 갖고도 뿌듯한 모양이다.

찻잔을 들고 쪽문 밖으로 나서니 테라스 밑으로 매장 주차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음...... 여기도 주차장이 넓어서 손님들이 많이 오겠군요.”



“네, 아휴...... 인간들이 차를 갖고 다니면서도 그렇게 배달을 시켜요. 거...... 어차피 아파트까지 차로 가면 몇 걸음만 들고 가면 되는 걸......”



“허허허...... 그렇죠? 배달사원을 많이 늘리셔야 하겠네요?”



“그래도 그럭저럭 합니다. 뭐 밀리는 시간에만 그렇지. 그래도 정신무장을 튼튼히 시켜둬서 끄떡없이 해 냅니다. 우리 본사 매장은 제가 아침마다 조회를 하면서 직접 챙기거든요. 마침 우리 점장이 제 후배 녀석인데 이곳으로 스카우트 해 온지 얼마 안 돼서요.”



계속되는 황부장의 잘난 척 하는 모습에 옆에 있는 지수의 눈이 하얗게 돌아가고 입술이 삐죽거린다. 뭔가 한마디 해주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아! 역시 그러시군요. 자...... 그럼 다음에 다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오늘은 동생도 있고 해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네, 그래요. 최소장도 잘 생각해 보고 우리 회사로 올 맘 있으면 연락해요. 대우는 섭섭하지 않게 해 줄 테니까......”



“아, 네......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 김과장님도 나오지 마세요. 차는 여기 주차장에 있으니까......”



“네, 그럼 최소장님...... 자주 좀 오세요. 언제 저녁에 오셔야 술이라도 한 잔 나눌 텐데......”



사무실을 나서 계단을 돌아서자마자 지수의 입이 열린다.



“아유...... 저 사람 재수 없어...... 어머! 오빠는 뭐 하러 그런 소리를 다 듣고 있어요?”



“응? 하하...... 재미있잖아.”



“오빠, 오늘 점포 평가하러 온 거라면서요? 그럼 여기 이 매장은 몇 점이나 나오는 거예요?”



“음...... 글쎄다...... 뭐, 기준 따라서 다 다르겠지만 내가 볼 땐 영 좋게 안 보이던데...... 우리 장난 좀 쳐 볼까?”



“무슨 장난이요? 어머! 전에 형님한테 들었는데...... 호호호...... 오빠 또 사기 치려고 그러는 거예요?”



“저 황부장이라는 사람이 자신만만해 하니까 한 번 시험 삼아 해보지 뭐...... 자, 차에 타라.”



“네, 후훗....... 어떻게 할 건데요?”



“넌 그냥 모른 척 나만 따라 다니면 돼.”



차를 타고 주차장을 나서 점심을 먹은 횟집으로 다시 가 가게 앞에 주차를 하고 가게로 들어선다. 이제 점심시간이 많이 지나 홀에는 손님도 없이 한산하다.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손님이 온 줄 알고 나오다 강주를 보고 웃으며 말을 건넨다.



“어머! 또 오셨네요?”



“아! 네...... 아휴...... 밖이 너무 더워서......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지금 물가로 놀러가려고 여기저기 물건을 사고 있는데...... 아줌마, 여기 조금만 앉아 있다가 갈게요.”



“아! 네...... 아유, 그러세요. 밖이 많이 덥죠?”



“네, 아주 미치겠습니다. 참...... 전화 한 번 써도 될까요? 뭐, 더운 날씨에 돌아다니느니 아예 여기서 물건 좀 배달을 시키는 게 좋겠는데......”



“네, 그거야 뭐...... 얼마든지 그러세요.”



주인 여자는 카운터 위의 전화를 쓰기 좋도록 돌려놓고는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고 강주는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한다. 담배를 꺼내 물고 잠시 지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방에다가 소리를 친다.



“아주머니......”



“네......”



“아! 우리가 빼 먹은 게 있어서 시장에 잠시 갔다 올 건데요. 물건 주문을 잘못 한 것 같아서...... 그 사이에 배달 오면 맥주 다섯 박스만 더 갖다 달라고 해 주시겠어요? 저희들 금방 갔다가 올게요.”



“네, 그러세요. 맥주 다섯 박스요? 아유...... 놀러 가는 분들이 많으신가 보다......”



“하하....... 네, 그것도 부족할지 몰라요. 저녁에는 여기 돌아와서 한 잔 더 하든지 하지요. 뭐......”



강주는 지수를 데리고 시장 골목 그늘에 숨어서 식당을 지켜보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지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강주의 꽁무니에 매달려 열심히 숨어 다닌다.

잠시 후 한 짐이나 되는 많은 짐을 가게 안으로 갖고 들어간 배달사원이 다시 나와서는 시계를 바라보다 할 수 없다는 듯 빈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다. 다시 맥주를 싣고 오려니 짐을 가게에 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어! 그 사이 왔다 간 모양이네.”



“아유...... 기다리다가 금방 간 모양인데......”



“아! 그랬어요? 와...... 짐이 제법 많네...... 자, 지수야. 트렁크 좀 열어라. 미리 실어둬야겠다.”



“네.”



강주는 차에 물건을 모두 싣고 지수를 차에 태워 그길로 차를 몰아 매장 주차장으로 돌아온다. 지수는 난생처음 해보는 도둑질에 가슴이 떨리는 모양이다.



“아유...... 오빠 들키면 어떻게 해요.”



“허허...... 참, 우리 얼굴 아무도 모르잖아. 전화도 내 거 안 썼고...... 괜찮아. 혹시 들켜도 그저 내가 시험 삼아 해 본 거니까 안심해도 돼. 별 걱정을 다 한다.”



“아! 참, 그렇지...... 호호호......”



“자, 나는 명함 받아가지고 나올 테니까 너는 아까 못 산 거 있으면 더 사고 있어.”



“네, 오빠. 많이 살 거니까 천천히 나오세요. 호호호......”



지수에게 당부를 해 두고 사무실로 들어서니 여직원과 점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강주를 맞는다.



“실례합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음...... 여기 내 명함을 맡겨둔다고 했는데......”



“어머! 그러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직원 과 점장은 몹시 당황했는지 벌떡 일어서고 여직원이 서랍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내며 이름을 묻는다.



“저...... 혹시 성함이......”



“아...... 최강주라고 합니다.”



“네, 이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허허허...... 네, 그래요. 고마워요.”



절을 꾸벅 하는 여직원에게 명함 케이스를 받아들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점장이 뛰어나와 만류를 한다.



“아! 이사님,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십니까?”



“아! 이런...... 허허...... 참, 그럼 차나 한 잔 주시겠습니까? 자, 반갑습니다.”



“네, 이리 앉으시지요.”



점장을 만나게 되었으니 알아듣게 조치를 취해놓고 다음을 기약해야 할 모양이다. 회장과 의논할 때만 해도 함량미달의 점장이라면 다른 직원들의 무사안녕을 위해서라도 조치를 해 버릴 생각도 있었지만 이제는 얼굴을 알리게 되어 버려 그것도 민망한 노릇이다.

나름대로 잘 보여야 할 점장의 속도 모른 채 하필 배달사원이 이 때 뛰어 들어온다.



“아, 점장님...... 와, 이거 미치겠습니다. 지금 네다바이 당한 것 같은데요.”



“뭐, 뭐야? 어디서...... 얼마나......”



“아! 그거 영수증 이리 가져와 봐요.”



강주가 일이 커지기 전에 만류하고 나서자 그 속을 알 리 없는 점장은 얼굴이 흙빛이 되고 경리 사원과 배달사원은 점장의 눈치만 보고 서 있다. 강주는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 준다.



“그거 직원들 교육상태가 어떤지 내가 테스트 해 본 겁니다. 자, 아가씨가 이 돈 가지고 나가서 처리 좀 해 줘요.”



“네?...... 어이쿠 이런......”



점장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황부장에게 듣자니 타 회사에 있다가 옮긴지도 얼마 되질 않았다던데 앞일이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자, 자......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합시다. 그래도 점장님은 오늘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모른 척 지나갈 일인데 이렇게 마주치게 됐으니 기회를 한 번 더 드리지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사님.”



“배달사원은 어떤 이유에서든 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물건을 놓고 떠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네, 네...... 다시 교육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야채코너에 있는 사원들이 부추 앞에서 정구지를 달라는데 못 알아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적어도 담당 사원이면 자주 쓰이는 사투리 정도는 알아들어야지요.”



“네......”



“그리고 아까 점심시간인데도 나물 종류가 다 준비되질 않았던데 일손이 많이 부족합니까? 그러면 인원보충이라도 요구를 하지 그랬어요?”



“아, 그게 아니라 계속 하는데도 워낙 물건 양이 많다 보니까......”



“그게 잘못이라는 거예요. 종류별로 조금씩 전부 다 선을 보인 후에 나머지 진량을 포장하면 그런 일이 없지요. 그저 일을 시켜 두고 나 몰라라 한다는 반증이에요. 피드백 몰라요? 항상 검토가 뒤 따라야지요?”



“......”



“신선식품은 그것대로 늦어지고 있는데 쓸데없이 과자 부스러기는 잔뜩 길바닥에 깔아두고 손님들 징검다리 밟듯이 다니게 하면 남들이 보면 장사가 잘 돼서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질 않아요. 정작 급한 것은 뒤로 미루고 잔뜩 깔려 있는 걸 채우느라고 손님이 물건을 찾는 데 턱짓으로 방향이나 알려주고......”



“네, 주의하겠습니다.”



“인원 배치에 대해서 더 연구할 필요가 있겠어요. 지금 이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겠지만 어쨌든 점장님은 내 얼굴을 봤으니 그것도 인연인데 기회를 한 번 더 드릴 테니까 개선 노력을 해 보세요. 다음에 다시 한 번 점검하러 나오겠습니다.”



“저...... 그럼 오늘 평가는......”



“음...... 오늘 일은 일단 무시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이 일이 다른 매장이나 본사에 알려지면 점장님은 무조건 평가에 관계없이 옷 벗어야 합니다. 이건 기획실에서 추진하는 거니까 본사에서도 모르는 일이에요.”



“아! 네. 잘 알았습니다.”



지수와 함께 산업도로를 달려 수원근교로 들어온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궁전 같은 건물들이 강주를 보고 손짓하는 것 같아 지수를 흘끔 쳐다본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다니다 보면 백설공주가 사는 줄 안다니 기막힌 노릇이다.



“지수야...... ”



“네, 오빠......”



“히힛......”



“왜요?.....”



차를 길 밖으로 몰아 길가에 즐비한 모텔 중 한 곳으로 차를 집어넣자 지수가 어깨를 때리며 앙탈을 부린다.



“아유, 이럴 줄 알았어요. 어쩐지 엉큼하게 웃더라...... 호호호......”



“야, 우리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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